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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의 기쁨/책속의 한줄

김호성(1992), 『천수경 이야기』를 읽다.

아진돌 2021. 1. 13. 08:41

김호성(1992), 『천수경 이야기』, 서울 : 민족사, 1쇄인쇄 1992.4.5. 5쇄 발행 1993.3.15.

 

2021년 1월 11일에 『천수경 이야기』를 읽었다. 엊그제 토요일에는 대전 시청역 근처에 있는 알라딘 중고서점에 갔다가 불교서적 코너에서 눈에 익은 책이 보여서 이 책을 샀다, 우리 집에도 있는 책 같았으나, 있으면 심묘장구대다리니경을 새롭게 알게 해준 도반에게 선물할 생각으로 샀다. 집에 와서 책꽂이를 둘러보니 예전 직장의 불교 모임인 성불회에서 법보 시로 받았던 책이 있었다. 책을 펼쳐보니 많은 곳에 밑줄이 그어진 것을 보니 일독을 했던 책이다. 아마 1993년 말에 책을 받았을 것이니 28년 전에 일독을 했을 것이다. 그 때는 주로 어떤 글에 밑줄이 그었는지도 궁금해서 그동안 읽어 오던 책을 잠시 덮어두고 이 책을 단숨에 읽게 되었다.

  

이 책의 머리말에 따르면, 천수경(千壽慶)은 한국 불교의 역사적 특징과 철학적 우수성이 가장 잘 드러난 경전이라고 한다. 천수경은 우리 조상들이 편집한 경전으로서 한국 불교의 독자성을 약여(躍如)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한다. 현재에도 가장 많이 읽고 외우는 경전의 하나로서 절에서 행하는 각종 의식이나 법회 때에는 반드시 독송하게 된다. 이 책은 여는 이야기, 풀어주는 이야기, 맺는 이야기 등 3부로 구성되어 있고, 제2부에 해당하는 풀어주는 이야기는 총 10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천수경은 천수천안(千手千眼)으로 표현되는 대자비 관세음보살에게 말하는 경전이라고 할 수 있다. 정구업진언 ‘수리 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와 신묘장구대다라니경이 포함되어 있는 경전이다. 이 책의 여는 이야기에 따르면, 현재 우리가 독송하고 있는 형태의 천수경은 천수다라니를 설하고 있는 『천수천안광대원만무애대비심다다라니경』(1권)이 조선 성종 7년(1476)에 최초로 간행되었으며, 서산(1520-1604) 스님 이후로 여러 사람에 의해 여러 단계를 거쳐 현재의 천수경으로 점차 편집되었다고 한다. 『천수천안광대원만무애대비심다다라니경』(신수대장경, 1060)은 가범달마(伽梵達磨) 삼장이 옮긴 경전이다. 한번의 독송을 통해서 발원, 귀의, 송주(誦呪), 찬탄, 참회의 오행(이를 千手의 五行이라 한다)을 다 갖추도록 편집된 독송용 경전이라고 한다.

  

요즘에는 대다라니에 대해 여러 가지 말도 많지만, 신수대장경에 나오는 다라니 독송의 열 가지 이익은 다음과 같다. ①모든 중생이 안락을 얻는다. ②모든 병이 낫는다. ③오래 산다. ④부자가 된다. ⑤모든 악업과 중죄를 소멸시킨다. ⑥장애와 어려움을 여의게 된다. ⑦모든 선행과 공덕을 더욱 많이 갖게 된다. ⑧모든 선근을 성취하게 된다. ⑨모든 두려움을 여의게 된다. ⑩모든 구하는 바를 속히 이루게 된다. 불교는 소원 성취가 어떤 절대자의 권능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본다. 천수다라니를 독송하는 것이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임을 명심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불교의 궁극적인 이상은 깨달음을 통해 중생들에게 이익을 주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성불이 아니라 성불을 통해서 얻은 힘으로 중생을 제도하는 데 있는 것이다.

  

천수경이 관세음보살에게 말하는 경전이다. ‘관세음’은 산스크리트 원어는 아발로키테슈바라(Avalokitesvara)인데 이를 구마라집(313-413) 삼장은 ‘관세음’으로, 현장(622-664) 삼장은 ‘관자재’로 옮겼다. 이수바라(Isvara)가 자재신의 뜻을 가지고 있으므로 현장의 번역이 보다 원어에 충실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관자재’보다는 ‘관세음’이 더 널리 통용된 것 같다.

  

저자는 최근에 다라니를 번역하고자 하는 시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다라니는 번역하지 않는다. 예로부터 번역하지 않고 지송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근래에 들어서 산스크리트어를 통해서 그 의미를 해석해 보고자 하는 경우가 있다. 천수경의 관세음보살이 힌두교의 시바(Siva)신과 비쉬노(Visnu)신의 혼합을 상징한 것이라는 로케쉬 찬드라(Lokesh Chandra) 교수의 연구가 그 좋은 예이다. 물론 그러한 일은 학문적 차원에서는 뜻있는 일이 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신앙적 입지에 서고자하는 우리들의 이야기에서는 예부터의 법대로 다라니를 해석하지 않기로 한다고 말한다. 맞는 말씀이다.

  

기복신앙으로 변해버린 신앙으로서의 불교보다는 수행으로서의 불교에 정진하다보니 다라니의 지송을 기복신앙으로 몰아붙이나 저자는 다음과 같이 다라니 지송에 대해 말하고 있다. 우리가 일심(一心)으로 다라니를 지송하면 어느덧 올바르지 못한 지해(知解)나 번뇌망상이 사라지게 된다. 이를 업장소멸이라 한다. 근세의 선지식인 수월(水月) 스님이나 용성 스님이 선사이면서도 모두 천수다라니를 지송하여 견처(見處)를 얻었던 것은 바로 그러한 선밀일치의 가풍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선과 밀, 화두와 다라니는 둘이 아니다. 실제로 천수다라니를 지송하고 있는 큰 스님들의 경우를 살펴볼 때 천수다라니를 반복해서 외우고 있다. ‘신묘장구대다라니’만 수 없이 반복해서 외우는 것으로 수행을 삼고 있다.

  

새해 인사와 관련한 저자의 의견도 내 마음에 와 닿았다. 흔히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새해가 되면 인사를 하고 또 뜻있는 분들은 복 받기를 비는 기복신앙은 올바른 신앙이 아니라고 비판한다. 이미 대승불교에 이르면 초기 불교에서와는 달리 붓다가 복을 줄 수 있는 분으로 되었으며, 또 수많은 보살들이 활동하고 있는 현실에서 ‘비는’ 행위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은 많은 문제가 제기되리라 본다고 말하고 있다. 불교는 물론 수행 정진을 통해 마음을 알아차리는 지혜를 얻어 행복을 찾는 것이 기본이지만, 불교가 고통 받는 중생들에게 희망을 주고 무엇인가를 바라는 마음을 어루만져 주지 못한다면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법에는 옳고 그름이 없지만 내 생각은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