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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여행 /조계종 교구본사 순례

조계산 송광사에 다녀오다

아진돌 2022. 1. 9. 18:01

2022년 1월 1일(토)에 대한불교조계종 25개 교구 본사 답사계획에 따라 21번째 답사지로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 송광사안길 100(순천시 송광면 신평리 12)에 있는 조계산 송광사(松廣寺)에 다녀왔다. 송광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이며, 보조국사 지눌 스님(1158~1210)을 비롯하여 조선 초기 고봉 국사까지 열여섯 분의 국사를 배출한 승보사찰(僧寶寺刹)이다. 국사란 나라가 인정하는 최고의 승직이자 당대를 대표하는 스승이다. 고려 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법보사찰(法寶寺刹) 해인사,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있는 불보사찰(佛寶寺刹) 통도사와 더불어 훌륭한 스님을 가장 많이 배출한 승보사찰(僧寶寺刹) 송광사를 우리나라 삼보사찰(三寶寺刹)이라 한다.

 

새해 첫 답사지로 송광사를 찾아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송광사 입구 주차장에서 조금 이른 점심을 먹고 홍교 위에 누각 형식으로 세워져 있는 청량각(淸凉閣)을 지나 편백나무 숲을 지나면 편액이 종서로 쓰여있는 다포식 건물인 일주문을 만난다. 남녀 영가들의 목욕처로 지어진 정면 1칸, 측면 1칸의 작은 건물인 세월각과 척주당을 지나 우화각이 지어져 있는 삼청교를 지나면 송광사 경내로 들어간다. 대웅보전은 아(亞)자 형으로 네 모퉁이를 안쪽으로 접어 넣은 특이한 건축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공포 처리가 쉽지 않았을 것 같으나 법당을 드나드는 중생들에게는 포근한 공간이다. 과거불인 연등불, 현세불인 석가모니불, 미래불인 미륵불이 모셔져 있는 대웅전에서 신묘장구대다라니경을 21독하고 전각들을 둘러보았다. 정면 1칸, 측면 1칸이면서도 팔작지붕에 공포가 커다란 다포식으로 지어진 약사전과 바로 옆의 영산전을 들러보며 작지만 웅장한 전각의 묘미를 느낄 수 있었다.

 

아름다운 정원을 가지고 있는 관음전과 바로 뒤의 보조국사 감로지탑을 참배하였다. 우측의 금강계단 현판이 있는 설법당 등에는 갈수가 없어서 아쉬웠다. 동안거 기간이라 스님들이 많이 거주하셔서 그런지 관음전 뒤에 있는 하사당과 응진전, 산신각으로 가는 길은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래도 발걸음을 조심해서 산신각까지 올라가 참배하고 옆으로 이동하여 송광사 전각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보았다. 마치 궁궐을 연상시키는 기와집들이 빼곡하게 자리잡고 있다. 스님들께서 기거하시는 건물위로 쏟아지는 햇살이 눈부시다.

 

정자 형태로 지어져 있는 무무문(無無門) 옆으로 하고 불일암까지 가는 산길로 접어들었다. 산내 암자인 부도암, 감로암을 둘러보고 법정 스님꼐서 기거하셨던 불일암까지 갔다가 무소유길을 따라 내려왔다. 산내 암자 중에서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 천자암길 105(순천시 송광면 이읍리 1)에 있는 천자암(天子庵)은 둘러보지 못했다. 곱향나무 쌍향수(雙香樹)를 보려고 차를 몰고 갔으나 중턱부터 길에 눈이 쌓여 있어서 되돌아와야 했다. 송광사에서 선암사로 가는 답사길을 걸어보면서 천자암에도 가보고 굴목재에 있는 보리밥집에서 점심도 먹어보는 기회를 만들기로 하고 발길을 돌렸다.

 

송광사 홈페이지(http://www.songgwangsa.org/)에 따르면, 송광사는 신라말 혜린(慧璘) 선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한다. 창건 당시의 이름은 송광산 길상사(吉祥寺)였으며 100여 칸쯤 되는 절로 30, 40명의 스님들이 살 수 있는 그리 크지 않은 규모의 절이었다고 한다. 그 뒤 고려 인종때 석조(釋照) 대사께서 절을 크게 확장하려는 원을 세우고 준비하던 중 타계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 50여년 동안 버려지고 페허화된 길상사가 중창되고 한국불교의 중심으로 각광받게 된 것은 불일 보조국사 지눌 스님의 정혜결사가 이곳으로 옮겨지면서부터이다. 지눌 스님은 1197년(명종 27년)부터 9년 동안의 중창 불사로 절의 면모를 일신하고 정혜결사 운동에 동참하는 수많은 대중을 지도하여 한국불교의 새로운 전통을 확립하였다. 이 때부터 송광사가 한국불교의 중심으로 각광받기 시작하였다. 그 동안 정유재란, 6.25사변 등 숱한 재난을 겪었으나 지속적인 중창 불사로 지금의 위용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송광사는 보조국사 지눌 스님께서 거조사로부터 길상사로 정혜결사를 옮겨와 수선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가까운 곳에 정혜사라는 절이 있어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산 이름도 송광에서 조계로 바꾸었다. 뒤에 절 이름도 수선사에서 송광사로 불리게 되어 조계산 송광사로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여러 차례 중창을 거치게 되었고, 1948년에 일어난 여순반란과 6.25사변을 거치면서 산중에 은신한 공비를 토벌하기 위하여 국군 토벌대는 작전상 절 주변의 숲을 벌채하게 되었다. 이에 격분한 공비들이 1951년 2월 절을 지키던 노인들을 학살하고 5월에는 절에 불을 질러 대웅전 등 중심부를 불태워 버렸다. 1955년부터 주지 금당(錦堂)스님과 화주 취봉(翠峰) 스님의 원력으로 5년 동안에 걸쳐 대웅전을 비롯한 건물들을 복구하였다.

 

송광사의 초기 이름인 길상사(吉祥寺)라는 이름의 절은 서울시 성북구에 있다. 서울의 길상사는 이곳 순천시 조계산 밑의 송광사의 말사이다. 서울 길상사는 본래 대원각이라는 고급 요정이었으나 요정의 주인이었던 고 김영한(1916~1999, 법명 길상화)이 법정 스님에게 자신이 소유한 요정 부지를 시주하여 사찰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김영한은 일제 시대의 시인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 등장하는 나타샤로 알려져 있으며, 백석은 연인이었던 그녀에게 자야(子夜)라는 애칭을 붙여주었다고 한다. 1985년에 김영한은 법정 스님에게 자신의 재산을 희사해 절을 짓게 해달라는 요청을 하였으나, 법정 스님께서 사양하였다고 한다. 김영한은 10년 가까이 법정을 찾아와 끈질기게 부탁했고 이에 법정 또한 이를 받아들여, 1995년 6월 13일 대한불교조계종 송광사 말사인 '대법사'로 등록하였다가 1997년에 길상사로 이름을 바꾸어 재등록하였다고 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에 소개된 송광사의 전각들을 소개한 글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조계산의 계곡물이 흐르는 물 위로 놓여 있는 무지개 다리 즉, 홍교(虹橋)인 극락교 위에 세워진 누각이 청량각(淸凉閣)이다. 청량각은 정면 1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청량각에서 500m 오르면 일주문이 있고, 일주문 앞에는 송광사의 역대 고승 및 공덕주의 비석들이 있다. 다포(多包)로 형성된 일주문은 조선 후기에 건립된 것으로 이 문의 현액이 보통 옆으로 한 줄로 쓰이는 데 대하여 종서로 씌어 있어 특이하다.

 

일주문 뒤쪽에 4방 1칸씩의 몹시 작은 건물이 두 채 있는데, 현판에 척주각(滌珠閣), 세월각(洗月閣)이라 하였다. 다른 절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건물이다. 송광사에서 가장 작은 건물로서 천도재를 지내기 위한 영가(靈駕)들의 관욕처(灌浴處)라고 한다. 즉, 망령도 남녀를 갈라서 척주각은 남자 영가를 위한 관욕소이고, 세월각은 여자 영가의 관욕소가 된다. 관욕소 왼쪽에는 보조국사가 스스로의 불멸을 입증하기 위하여 심었다는 고향수(枯香樹)가 있다. 높이 15m의 이 고목나무는 보조국사가 다시 송광사를 예방할 때 소생한다는 전설이 얽혀 있다. 고향수를 지나면 계곡을 지나는 곳에 능허교(凌虛橋)가 있고, 이 위에 우화각이라는 일종의 문루가 4칸 길이로 서 있다.

 

천왕문, 해탈문(解脫門), 대장전(大藏殿), 종고루(鐘鼓樓), 법왕문 등의 건물들이 대웅전을 향하여 일직선상에 나란히 위치하였다. 이들 가운데 천왕문을 제외하고는 1951년 공비들에 의하여 불타 버렸고, 현재 종고루만이 재건되었다. 해탈문은 화재 전에 정면 3칸으로 지붕의 중앙에 낮은 규모로 1칸을 다시 올려 건물이 독특한 양상을 띠었다고 한다. 대장전 안에는 화재를 입기 전까지만 해도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었고, 사찰의 도서실로 사용되었다. 종고루 2층에는 범종, 운판, 목어, 홍고(弘鼓) 등 사물(四物)이 있다. 법왕문은 정면과 측면 각 3칸이었으나 역시 소실되고 아직 복구되지 않았다. 이 문을 통과하면 법왕인 부처님을 봉안한 대웅전에 바로 도달할 수 있다는 뜻에서 이 문을 법왕문이라고 한다.

 

대웅보전은 송광사의 중심건물이다. 1951년의 화재로 불탄 뒤 1961년에 주지 금당(金堂)이 중창하였다. 1988년의 중창 때, 평면 넓이 108평의 ‘아(亞)’자 형의 건물을 다시 세웠으며, 내부에는 석가모니불과 연등불, 미륵불 등의 삼존불을 봉안하였다. 대웅전 뒤 계단을 올라 진여문(眞如門)을 통과하면 설법전에 이른다. 설법전은 본래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을 두던 곳으로, 1899년 봄, 조정에서 인출한 해인사의 대장경 4부 가운데 1부를 봉안하였으나, 1951년 화재 때 설법전과 함께 소실되었다. 수선사는 최초에 조계총림의 방장(方丈)인 보조국사의 거실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 말기에는 조사당(祖師堂)으로 이용되었다. 대웅전 뒤쪽으로 설법전이나 선방 등이 있는 예는 요즘의 다른 사찰에서 보기 어려운 독특한 가람배치이다.

 

송광사의 건물은 대웅전 뒤의 높은 축대를 기준으로 대상과 대하로 대별된다. 대상의 건물로는 상사당·하사당·향적전(香積殿)·응진전·성수전(聖壽殿)·산신각·진여문·청운당·백운당·설법전·차안당(遮眼堂)·조사당·국사전·진영당(眞影堂) 등이 있다. 상사당은 하사당과 함께 남향으로 병립해 있는데 제9대 국사 담당(湛堂)이 이곳의 물을 마시고 3일 만에 오도하였으므로 일명 삼일암(三日庵)이라고 부른다. 지금의 수선사 건물을 짓기 전에는 이곳이 선방으로 사용되었다. 보물 제263호로 지정되어 있는 순천 송광사 하사당은 특수한 건물로 건축양식이 국사전과 같으며 조선 초기형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응진전은 1951년의 대화재를 모면한 1623년(인조 1)의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4칸이며, 지붕은 역시 맞배지붕이다. 내부에는 석가여래와 그의 제자 16나한을 봉안하였다. 응진전 바로 옆에는 노전(爐殿)의 화목을 적재하여 두는 향적전이 있다. 국보 제56호로 지정되어 있는 순천 송광사 국사전은 승보사찰인 송광사의 상징적 건물이다. 송광사와 더불어 나라를 빛낸 국사들의 영정을 봉안하고 그들의 덕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일종의 법당이다. 진영각은 그 편액을 풍암영각(楓巖影閣)이라고 하였는데 그 까닭은 조선시대의 송광사 대덕들은 거의 다 풍암의 법손이었으므로 그와 같은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이다.

 

보물 제302호로 지정되어 있는 순천 송광사 약사전은 송광사 안에서 규모가 가장 작은 법당이다. 건물 양식이 독특하며 내부에는 약사여래상과 후불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순천 송광사 영산전은 보물 제30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내부에는 석가여래의 소조상을 비롯하여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 석가여래의 일생을 묘사한 팔상탱화(八相幀畵)가 봉안되어 있다. 관음전은 1903년에 건립되었으며, 관음전의 뒤쪽 언덕에는 보조국사의 부도탑이 있다. 높이 250㎝의 탑은 고려 말기의 특징을 보이고 있고, 4각 기단 등은 대체로 딱딱한 감을 주고 있다. 그 옆에는 ‘佛日普照國師甘露之塔(불일보조국사감로지탑)’이라고 쓴 오세창(吳世昌)의 글씨가 있다. 전면과 측면이 각각 3칸인 지장전은 유명계(幽冥界)의 시왕(十王)을 봉안하였으므로 일명 시왕전이라고도 한다. 화엄전은 대웅전 서남방 약 300m 지점에 위치한다. 1641년(인조 19) 건립된 화엄전에는 송광사의 장경판본들이 봉안되어 있다. 화엄전 주위에는 53불(佛)의 석불을 봉안한 불조전이 있고, 삼성각·월조헌(月照軒)이 있다.(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송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