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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여행 /조계종 교구본사 순례

두륜산 대흥사에 다녀오다

아진돌 2022. 1. 9. 18:12

2022년 1월 2일(일)에 대한불교조계종 25개 교구 본사 답사계획에 따라 22번째 답사지로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대흥사길 400(삼산면 구림리 799)에 있는 두륜산 대흥사(大興寺)에 다녀왔다. 대흥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이며, 우리 국토의 최남단에 위치한 두륜산(頭崙山)의 빼어난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한 사찰이다. 대흥사는 2018년 6월에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Sansa, Buddhist Mountain Monasteries in Korea)”이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두륜산을 대둔산(大芚山)이라 부르기도 했기 때문에 원래 사찰명은 대둔사(大芚寺)였으나, 근대 초기에 대흥사로 명칭을 바꾸었다. 고은 선생의 『절을 찾아서』에는 대둔사(구 대흥사)라고 소개하고 있으나, 지금은 대흥사로 정착되었다. 오래 전에 대륜산 산행을 하면서 둘러본 후 오랜만에 찾아갔다.

 

절 입구 주차장에서 일주문을 지나 부도전을 지나면 반야교를 건너게 된다. 해탈문을 지나면 두륜산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두륜산에 취해서 대웅보전 가는길이라는 팻말을 보지 못하고 연못이 있는 곳으로 직진하면 관음전을 만난다. 관음전 우측으로 진행하면 대웅전이 있을 것처럼 생각하고 계단을 올라가면 커다란 보현전과 문수전 사이에 호국대전을 건설하고 있는 곳으로 닿게 된다. 마침 보현전에서는 천수경 강의가 있어서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북원에 있는 대웅보전에서 행해지는 사시예불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더구나, 가람 배치를 제대로 공부하지 못한채로 도착하다보니 남원 구역에 있는 가허루와 천불전 등을 답사하지 못한 아쉬움을 남겼다.

 

대흥사 홈페이지(http://www.daeheungsa.co.kr/)에서 소개하고 있는 대흥사의 가람 배치는 특이하다. 절을 가로지르는 금당천을 사이에 두고 북쪽과 남쪽으로 당우들을 배치하였는데, 다른 절에서 보이는 가람배치 형식을 따르지 않고 당우들을 자유롭게 배치하는 독특한 공간구성이 특징이다. 넓은 산간 분지에 위치한 대흥사는 향로봉, 고계봉, 노승봉, 가련봉, 도솔봉, 혈망봉, 연화봉의 8개 봉우리로 들러 싸여 있으며, 크게 남원과 북원 그리고 별원의(표충사, 대광명전, 박물관) 3구역으로 나뉘어져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다.

 

낮은 지형에 자리잡은 북원에는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명부전, 응진전, 산신각, 침계루, 백설당, 대향각, 청운당, 선열당 등이 위치하고 있으며, 남원에는 천불전을 중심으로 용화당, 봉향각, 가허루, 세심당, 적묵당, 정진당, 만월당, 심검강 등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남원 뒤쪽으로 멀리 떨어져서 서산대사의 사당인 표충사 구역과 동국선원내에 대광명전 구역이 있다.

 

해탈문에서 왼쪽 방향으로 들어가면 침계루를 만난다. 침계루를 지나면 북원 구역으로 들어간다. 정면에 대웅보전, 그 좌우에 명부전과, 응진전, 산신각이 나란히 있다. 응진전 앞 3층석탑은 이 절의 유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물 제320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번 답사에서는 들어가 보지 못한 남원 구역에는 범종각, 천불전, 동국선원, 용화당 등 강원과 승방 몇채가 각각 돌담으로 구획되어 있다. 천불전의 지붕과 건물의 맵시가 매우 경쾌하며 정면 3칸 분합문 전체가 아름다운 꽃창살이다. 내부에는 경주에서 초의스님을 비롯한 8분의 스님들이 직접 깎아 제작 운반해 온 옥돌 불상 천 분이 모셔져 있다.

 

대흥사 홈페이지(http://www.daeheungsa.co.kr/)에 따르면, 대흥사의 창건 연기도 다양하게 전하고 있으나, 426년(백제 구이신왕 7년)의 신라 정관존자(淨觀尊者) 창건설을 소개하고 있다. 신라의 정관 스님이 426년 대흥사 산내 암자의 하나인 만일암을 창건한 후 508년(무령왕 8년)에 이름을 알 수 없는 선행(善行) 비구가 중건하였다고 하나 안타깝게도 이 자료에서 창건주로 소개한 정관 존자는 생애나 활동 내용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다. 『죽미기(竹迷記)』는 544년(신라 진흥왕 5년) 아도화상(阿度和尙)의 창건설을 전하며, 자장(慈藏) 스님과 도선(道詵) 스님이 계속해서 중건하였다는 기록도 함께 실려 있다. 현재 사찰 내에서는 대체로 아도화상의 창건설을 따르고 있다. 하지만 지금 응진전(應眞殿) 앞에 세워져 있는 삼층석탑의 제작 연대가 통일신라 말기 경으로 추정되고 있는 상태이므로 대흥사는 늦어도 통일신라 말기 이전에 창건된 고찰로 보아야 한다.

 

대흥사 홈페이지에서는 호국도량임을 강조하며, 임진왜란 이후 서산(西山)대사의 의발(衣鉢)이 전해지면서 조선불교의 중심 도량이 되었고, 한국불교의 종가집으로 그 역할을 다해온 도량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일찍이 서산대사가 “전쟁을 비롯한 삼재가 미치지 못할 곳(三災不入之處)으로 만년동안 훼손되지 않는 땅(萬年不毁之地)”이라 하여 그의 의발(衣鉢)을 이곳에 보관한 도량이다. 제1대종사 풍담(風潭) 의심 스님으로부터 초의(草衣) 의순 스님에 이르기까지 13분의 대종사(大宗師)가 배출되었으며, 만화(萬化) 스님으로부터 범해(梵海) 스님에 이르기까지 13분의 대강사(大講師)가 이곳에서 배출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13 대종사 가운데 한 분인 초의선사로 인해 대흥사는 우리나라 차문화(茶文化)의 성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표충사는 절에서는 흔하지 않은 유교 형식의 사당으로, 서산대사를 중심으로, 사명당 유정, 뇌묵당 처영스님의 진영을 봉안하고 있다. 유물전시관인 성보박물관에는 서산대사의 가사와 발우, 친필선시, 신발, 선조가 내린 교지 등 유물과 정조가 내린 금병풍 등이 보관돼 있다. 표충사 뒤편으로 300미터쯤 들어간 곳에 호젓하게 자리한 대광명전은 현재 선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 외에 8칸짜리 일자집인 보현각, 요사채도 있다. 이 밖에 경내 당우들에 걸려 있는 현판 글씨들은 당대 명필들이 쓴 조선시대 서예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표충사는 정조대왕, 대웅보전, 천불전, 침계루는 원교 이광사, 백설당 지붕밑 무량수각은 추사 김정희, 가허루는 전주에서 활약하던 호남의 명필가 창암 이삼만의 글씨이다.(출처 : 대흥사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