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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부석사에 다녀오다

아진돌 2022. 3. 7. 22:11

2022년 3월 5일(토)에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부석사로 345(북지리 148)에 있는 부석사(浮石寺)애 다녀왔다. 10여년 전에 문화유산답사 활동으로 다녀온 후 오랜만에 다시 찾았다. 부석사는 대한불교조계종 16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이며, 2018년 6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신라 문무왕 6년(676년)에 의상대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676년에 의상대사가 중국 유학후 수도처로 삼아 안주하다가 입적할 때까지 계시던 사찰이다. 우리나라 화엄종의 본찰로 초조인 의상대사 이래 그 전법 제자들에 의해 거대한 사찰로 발전한 절이다.

 

부석사는 김순우 선생의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라는 기행문으로도 유명하다. 무량수전은 맞배지붕에 주심포 건물로 봉정사의 극락전이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판명나기 전까지 가장 오래된 건물로 이름을 떨치던 고건축이다. 봉정사 극락전, 수덕사 대웅전과 함께 배흘림 기둥에 주심포 양식으로 맞배지붕을 이고 있는 우리의 아름다운 건축 양식을 대변하고 있는 건물이다. 얼마 전에 아들이 수덕사에 갔다가 대웅전 앞에서 김순우 선생의 『무량수전 개흘림 기둥에 기대서서』를 언급한 글을 보면서 영주 부석사를 다시 한번 더 가보고자 길을 나섰다.

 

또한,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 선묘 낭자 이야기로 유명한 절이다. 조사당 앞에는 의상 대사의 지팡이에서 가지와 잎이 나왔다는 선비화가 있다. 선비화를 소개한 안내판을 보면 이 나무는 골담초이고, 이황 선생께서도 이 서빈화르 보고 시를 지었다고 한다. 실제로 아래쪽은 그리 굵게 보이지 않아서 천년 이상을 살아낸 나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신비하다. 이곳 부석사 창건 설화와 똑같은 창건 설화를 갖고 있고 당우의 이름들까지 동일한 부석사가 충남 서산시 부석면 취평리에도 있다. 서산의 부석사는 677년 문무왕 17년에 의상에 의해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두 곳에 부석사를 같이 가보기를 추천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에 따르면,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이 절의 창건 화가 수록되어 있다. 당나라로 불교를 배우기 위하여 신라를 떠난 의상은 상선을 타고 등주(登州) 해안에 도착하였는데, 그곳에서 어느 신도의 집에 며칠을 머무르게 되었다. 그 집의 딸 선묘(善妙)는 의상을 사모하여 결혼을 청하였으나, 의상은 오히려 선묘를 감화시켜 보리심을 발하게 하였다. 선묘는 그때 “영원히 스님의 제자가 되어 스님의 공부와 교화와 불사를 성취하는 데 도움이 되어드리겠다.”는 원을 세웠다. 의상은 종남산에 있는 지엄(智儼)을 찾아가서 화엄학을 공부하였다.

 

그 뒤 귀국하는 길에 의상은 다시 선묘의 집을 찾아 그동안 베풀어준 편의에 감사를 표하고 뱃길이 바빠 곧바로 배에 올랐다. 선묘는 의상에게 전하고자 준비해 두었던 법복과 집기 등을 넣은 상자를 전하기도 전에 의상이 떠나버렸으므로, 급히 상자를 가지고 선창으로 달려갔으나 배는 이미 떠나가고 있었다. 선묘는 의상에게 공양하려는 지극한 정성으로 저만큼 떠나가는 배를 향해 기물 상자를 던져 의상에게 전하고는, 다시 서원을 세워 몸을 바다에 던져 의상이 탄 배를 보호하는 용이 되었다.

 

용으로 변한 선묘는 의상이 신라에 도착한 뒤에도 줄곧 옹호하고 다녔다. 의상이 화엄의 대교(大敎)를 펼 수 있는 땅을 찾아 봉황산에 이르렀으나 도둑의 무리 500명이 그 땅에 살고 있었다. 용은 커다란 바위로 변하여 공중에 떠서 도둑의 무리를 위협함으로써 그들을 모두 몰아내고 절을 창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의상은 용이 바위로 변하여서 절을 지을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해서 절 이름을 부석사로 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부석사의 무량수전 뒤에는 부석(浮石)이라는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가 선묘용이 변화했던 바위라고 전한다.

 

창건 후 의상은 이 절에서 40일 동안의 법회를 열고 화엄의 일승십지(一乘十地)에 대하여 설법함으로써 이 땅에 화엄종을 정식으로 펼치게 되었다. 특히, 의상의 존호를 부석존자(浮石尊者)라고 칭하고 의상의 화엄종을 부석종(浮石宗)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모두 이 절과의 연관에서 생겨났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국보 제18호인 부석사 무량수전과 국보 제19호인 부석사 조사당을 비롯하여, 조선시대 후기의 건물인 범종루, 원각전, 안양루, 선묘각, 응진전, 자인당, 좌우 요사, 취현암, 성보전시관 등이 있다. 선묘각은 부석사의 창건연기와 인연이 있는 선묘의 영정을 봉안하여둔 곳이다.

 

범종루는 사찰의 중문(中門)에 해당하며, 본전을 향하는 입구 쪽에서는 팔작지붕을 하고 반대 방향은 맞배지붕이므로 일반 사찰건축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특이성을 보이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4칸의 2층 누각으로서, 누각에는 ‘鳳凰山浮石寺(봉황산 부석사)’라는 편액이 있을 뿐 범종은 없다. 안양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집으로서, 누각 안에는 부석사의 현판 기문을 모아두었는데, 그 안에는 사명당이 쓴 「안양루 중창기」가 있다. 또, 취현암은 원래 조사당 옆에 있었던 부석사의 선원이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이전되어 현재는 주지실과 종무소로 사용되고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국보 제17호인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과 국보 제45호인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 국보 제46호인 영주 부석사 조사당벽화, 보물 제249호인 영주 부석사 삼층석탑, 보물 제255호인 영주 부석사 당간지주, 보물 제735호인 영주 부석사 고려목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27호인 영주 부석사 원융국사비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원융국사비는 절의 동쪽 500m 지점에 위치하며 1054년에 건립한 것이다. 그 외에 삼층석탑 두기와 동쪽 언덕에는 1기의 고려 말 부도를 포함한 10여 기의 부도가 있다.

 

무량수전 앞에 안양루를 오르는 석단이 2단으로 조성되었으므로, 대석단과 합하여 상·중·하의 셋으로 보는 가람 경영 방법의 하나로 볼 수도 있다. 선비화는 의상이 사용했던 지팡이를 꽂아 놓았더니 살아난 것이라 하는데, 『택리지(擇里志)』에 의하면 의상이 죽을 때 “내가 여기를 떠난 뒤 이 지팡이에서 반드시 가지와 잎이 날 것이다. 이 나무가 말라 죽지 않으면 내가 죽지 않으리라.” 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인용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부석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