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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여행 /문화유산탐방

세종시 덕성서원과 숭덕사를 다녀오다.

아진돌 2024. 3. 31. 15:15

2024년 3월 30일 세종시 원수산 산행을 시작하기 전에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 도담1길 3-4(연기면 세종리 734-20)에 있는 덕성서원(德星書院)과 서원 내에 있는 숭덕사(崇德祠)에 다녀왔다. 이곳 숭덕사는 함경도 홍원에 있던 숭덕사가 남북 분단으로 북쪽에 위치하자, 1978년에 문경공(文敬公) 전재 임헌회(全齋 任憲晦, 1811∼1876)를 배향하기 위한 사우를 이곳 유허지에 짓고 숭덕사라 했다 한다. 그 후 1990년에 서원을 건립하고 덕성서원이라 했다고 한다.
 
임헌회 선생은 천안 직산면 신음리에서 태어나셨고, 본관이 풍천이고 시호는 문경(文敬)이시다. 19세기말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이며, 기호학파의 거유이시다. 지금의 도담동인 이곳 연기군 남면 방축리에 내려와 후진 양성에 힘쓰신 분이다.
 
세종시 도담동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잘 정비되어 있는 우측 길로 계속 올라가면 원수산 등산로 초입에 위치해 있다. 입구에는 커다란 은행나무 한 그루가 서 있고, 입구는 솟을삼문으로 되어 있다. 세 개의 문 중에서 가운데 문이 높은 솟을삼문은 가운데 문은 신이 다니는 문이고, 참배객들은 우측 문으로 들어가서 좌측 문으로 너오도록 되어 있다. 오늘은 오른쪽 문만 열려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오른쪽 문으로 들어갔다가 오른쪽 문으로 나와야했다.
 
솟을삼문으로 지어진 외삼문에는 입도문(入道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일부 인터넷 자료에 입덕문(入德門)으로 소개될 정도로 입도문이라는 현판은 도교적인 면이 엿보여 특이하다. 좌측에는 덕성서원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 강당이 있고 내삼문을 지나면 숭덕사가 있다. 숭덕사는 전재 임헌회 선생 등 7분을 배향하는 곳이다. 중앙에는 문경공의 위패가 모셔져 있고 좌우로 6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소개된 덕성서원 자료에 따르면, 1885년(고종 22)에 관북지방의 유림들이 함경도 홍원에서 문경공(文敬公) 전재 임헌회(全齋 任憲晦, 1811∼1876)를 배향하기 위해 숭덕사(崇德祠)를 창건하였다. 분단 이후 1978년에 전국 유림의 발기로 그의 유허지가 있는 현재의 위치에 사우를 세우고 그대로 숭덕사라고 하였다. 이때 임헌회 외에 문인 6명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1990년에 서원을 건립하고 임원회의 유허지 명을 따라 덕성서원이라 하였다. 2014년 9월 30일에 세종특별자치시 향토유적 제40호로 지정되었다.
 
임헌회(任憲晦)는 19세기 한말 대표적인 성리학자로, 기호(畿湖) 유학의 거두로서 유림의 추앙을 받았다. 여러 관직을 사양하고 연기(현 세종특별자치시)에 내려와 후진 양성에 힘썼다. 기호 낙론의 맥을 계승하고 있는 홍직필(洪直弼, 1776∼1852)의 문인이며, 자신의 문하에는 한말 거유로 평가받는 간재(艮齋) 전우(田愚, 1841∼1922)가 있다.(인용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덕성서원)
 
1978년에 전국의 유림 1000여 명이 전재 임헌회 선생의 유허지인 연기군 남면 방축리에 사우를 복원하여 임헌회 외 간재 전우(艮齋 田愚) 선생과 불궤재 이재구(不匱齋 李載九)을 배향하고, 병암 김준영(炳菴 金駿榮, 1842∼1907), 성암 이유흥(誠菴 李裕興, 1859~1923), 노암 조홍순(魯菴 趙弘淳), 경석 임헌찬(敬石 任憲瓚, 1876∼1956) 등을 종향하였다고 한다. 전우 선생과 이재구 선생은 임헌회 선생의 문인이고, 김준영, 이유홍, 조홍순, 임헌찬 선생은 전우의 문인이다(출처: 덕성서원 리플렛). 참고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이유흥 선생은 김준영 선생의 문인이라고 소개하고 있어서 어느 것이 맞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 숭덕사에서 바라본 내삼문 방향
▲ 솟을삼문으로 지어진 외삼문 - 입도문
▲ 외삼문에서 바라본 내삼문
▲ 남향으로 지어진 서원에서 서재에 해당하는 건물이 덕성서원
▲ 동재에 해당하는 건물
▲ 숭덕사
▲ 전재 선생 위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