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27일 전남 광주시 무등산 국립공원의 증심사지구 탐방지원센터 쪽으로 올라가면서 광주시 동구 증심사길 177(운림동 56)에 있는 무등산 증심사를 둘러보았다. 일기예보와는 딴판으로 비가 많이 와서, 삼배의 예도 생략하고 반배를 올리며 경내를 둘러보았다. 비가 어찌나 세차게 내리던지 사진에 빗줄기가 주룩주룩 흐르고 있다. 다음에 무등산을 한 번 더 와볼 계획이므로 그때 좀 더 좋은 사진을 다시 올리고자 한다.
증심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松廣寺)의 말사이다. 디지털 광주문화대전에서 소개하고 있는 증심사 자료에 따르면, 860년(신라 헌언왕 4년)에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이신 철감선사(澈鑑禪師) 도윤이 창건하였고, 1094년(고려 선종 11년) 혜조국사(慧照國師)가 중수하였으며, 1443년(세종 25년) 광주 목사 김방(金倣)이 자신의 녹봉으로 중창하였다. 정유재란으로 불타버린 후 1609년(광해군 원년)에 석경, 수장, 도광 등 3대 선사가 4창 하였다고 한다. 6·25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4월 22일에 50여 명의 무장공비에 의하여 오백전과 노전(사성전)을 제외한 대웅전, 명부전, 극락전, 회승당, 취백루 등 조선 중기의 건축물들이 모두 소실되었고, 귀중한 문화재들이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그 후 1970년부터 복원 불사가 진행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증심사 가람 배치는 계곡 방향을 따라 동서 축선을 따라 기울어진 지형을 돌계단과 큰 단으로 나누어서 건물이 배치되는 산지가람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일주문을 지나면 바로 왼쪽에 사찰의 역사를 묵묵히 말해주는 부도전이 있다. 이 부도전은 예전에 취백루 아래쪽 공터에 있었으나, 현재는 일주문 좌측 언덕으로 옮겨놓았다고 한다. 6기의 부도 중 3기는 스님의 부도고, 3기는 신도들의 것이라 한다. 신도들의 부도가 사찰의 부도전에 같이 모셔져 있는 것도 특이하다.
사천왕문을 지나면 높은 축대로 둘러싸여 있는 2층 누각 취백루(翠柏樓)를 만난다. 6·25 한국전쟁 때 불타버린 취백루는 1998년에 정면 5칸에 측면 3칸 규모로 다시 지어졌다고 한다. 취백루 앞 공간에서 대웅전 공간으로 들어가는 계단은 취백루 밑을 통과하는 것이 아니고, 취백루 왼쪽 공간으로 올라가고 그곳에서 한 번 더 계단을 올라가야 대웅전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다. 무슨 이유로 누각의 아래쪽을 통로로 사용하지 않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취백루 왼쪽에 있는 계단을 오르면 대웅전 건물이 서서히 드러난다. 오른쪽에는 배롱나무가 빨간 꽃을 화려하게 피우고 있었다. 대웅전을 바라보고 왼쪽에는 적묵당이 있고 우측에는 행원 당이 자리 잡고 있다. 대웅전 옆에는 석조보살입상을 모신 원통전이 있다. 이 석조보살입상은 담양군 남면 정곡리의 서봉사지(瑞峯寺址)에 있던 것을 당시 전라남도 광주 지역의 부호(富豪) 현준호(玄俊鎬)의 도움으로 지금의 자리로 옮겨 온 것이라고 한다. 처음 석조보살입상이 증심사에 모셔졌을 때 위치는 오백전 왼쪽, 7층 석탑의 옆자리였다. 1990년대 사진을 보면 보관, 눈, 코, 입 등의 형태가 온전히 보였으나 바깥에서 몇십 년 이상 서 있으며 풍화로 훼손되었다. 그러다 2003년 오백전 건물을 보수하면서 대웅전을 바라보고 대웅전 왼쪽에 원통전을 지어 모셨다.
대웅전을 바라보고 오른쪽에는 지장전이 있다. 지장전 건물에는 특이하게도 지장전 현판과 함께 왼편 출입문에 회심당이라는 현판이 같이 걸려 있다. 증심사 홈페이지에 보면, 지장전이면서 회심당 이기도 한 기이한 두 집 살림의 역사는 1950년 6·25 한국전쟁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증심사에는 일찍이 일반 신도를 위한 사당인 회심당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차에 6·25 한국전쟁 때 불타버린 지장전을 지을 마땅한 방법이 없어 옆에 있던 회심당을 헐고 지장전을 다시 지은 것이라고 한다.
대웅전 뒤에는 삼층석탑 뒤로 오백전이 있고 바로 옆에는 비로전이 있다. 비로자나불을 모신 비로전이 오백나한을 모신 오백전 옆에 세워져 있는 것도 특이한 점이다.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작품으로 1963년에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은 원래 1930년대 전남도청 뒤편이었던 전라남도 광주군 서방면 동계리의 대황사(大皇寺)에 있던 것을 1934년 대황사가 폐사되면서 증심사로 옮겨 왔다고 한다. 삼층석탑은 무등산에서 가장 오래된 석탑으로 소개되고 있다. 탑의 양식을 살펴보면 철감선사가 증심사를 창건한 시기인(855~868)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후기에 세워졌을 거로 추정하고 있다.
오백전은 세종대왕 재위 시절(1443년), 광주의 생명 젖줄인 경양방죽을 축조한 광주 목사 김방이 관세음보살 현몽을 좇아 오백전을 불사했다고 한다. 6.25 한국전쟁 때 당시 다른 전각은 불에 탔으나 증심사 오백전만은 불에 타지 않았던 영험한 곳이다. 오백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조선 초기에 지어진 강진 무위사(無爲寺)의 극락전과 같은 계통의 건축양식을 보이고 있다. 오백전 내의 오백 나한상은 1443년의 중창 때 김방이 조성한 것이라고 전해 오는데, 전국적으로 보기 드문 불상이다. 오백전 좁은 공간에 500명의 나한을 모시다 보니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불단을 ‘ㄷ자’ 형으로 배치했다. 광주 지방에는 경양방죽과 오백전을 지은 광주 목사 김방과 은혜를 갚은 개미떼 이야기가 지역의 설화로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오백전 옆에는 고려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오층석탑과 7층석탑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오층석탑은 1933년 일제강점기 때 해체 수리를 하던 중에 탑내에서 금동석가여래입상과 금동보살입상 등이 나왔다고 한다. 오층석탑에서 발견된 금동석가여래입상과 금동보살입상은 1955년 국보로 지정되었으나, 6·25 한국전쟁 중에 경찰서 금고에 보관했던 불상이 분실되어 전하지 않고 국보에서 해제되었다고 한다. 7층석탑은 전체적으로 매우 가늘고 긴 느낌이 들며 안정감이 없어 보이지만, 탑신 부분에 화문과 산스크리트어가 양각되어 있다. 그래서 범자(梵字) 7층 석탑이라고도 부른다. 각 층의 4면에 동일하게 새긴 글씨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읽으면 육자대명왕진언인 ‘옴마니반메훔’이다.
비가 많이 오는 중이라 경황이 없어 대웅전, 지장전, 비로전, 오백전 등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둘러본 것이 여간 아쉬운 게 아니다. 다음번에 무등산 등산을 다시 갈 때 꼭 참배를 드리기로 하고 마음을 추스르며, 증심사에 관한 여러 자료를 간추려서 여기에 올린다. 인터넷에 회자하는 자료들이 오타도 많은 점이 아쉬웠다. 어쩌면 이 글 중에도 오류가 있을 수 있다. 그래도 믿을 만한 자료로는 증심사 홈페이지의 소개글들과 디지털 광주문화대전에서 소개하고 있는 증심사 자료 등이 가장 믿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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