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전하는 아진돌(AginDoll)의 일상 이야기

즐거운 여행 /문화유산탐방

운악산 봉선사에 다녀오다.

아진돌 2024. 5. 18. 19:00

2024년 5월 12일(일)에 대전 한밭문화원의 5월 문화탐방 활동으로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봉선사길 32(진접읍 부평리 255) 운악산 기슭에 있는 봉선사(奉先寺)에 다녀왔다. 어젯밤까지도 비가 내렸으나, 아침에 일어나니 화창한 날씨라 문화탐방을 가볍게 출발할 수 있었다. 2대의 관광버스로 출발한 문화탐방 일행은 생각보다 일찍 남양주시의 봉선사에 도착하였다. 일주문 앞에서 포교사분들과 불교문화해설사 분들을 만나 설명을 들으면서 경내를 둘러 볼 수 있었다.
 
봉선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로 은행나무로 유명한 양평의 용문사와 사나사 등을 말사로 두고 있다. 봉선사는 국립수목원으로 이름이 바뀐 광릉수목원 옆에 있다. 세조대왕의 능인 광릉을 지키기 위한 절이기도 하다. 참배객들에게는 아주 편하고 포근하게 느껴지는 절이다. 우선 입장료나 주차비를 받지 않아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고 큰법당이라는 한글 현판이 걸려 있는 대웅전이 있는 곳까지 쉽게 들어갈 수 있는 곳에 넓은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어서 좋다.
 
봉선사(奉先寺) 홈페이지(http://www.bongsunsa.net/)에 따르면, 봉선사는 교종 수사찰(首寺刹)의 종풍과 선종 사찰의 법맥을 그대로 전승하고 있는 대가람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1550년(명종 5)에 이 절이 선교 양종 중 교종의 수사찰(首寺刹)로 지정되어 전국의 승려 및 신도에 대한 교학 진흥의 중추적 기관이 되었던 역사적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봉선사는 서기 969년 고려 광종 20년에 법인 국사께서 창건하고 운악사라고 하였다. 그 후 서기 1469년(예종 1년)에 세조의 비 정희왕후 윤씨가 세조의 능침을 이산에 모시고는 광릉이라 하고, 선왕의 능침의 명복을 비는 자복사로 삼고 89칸 규모로 중창한 뒤 봉선사라 하였다. 한명회가 봉선사 중창을 지휘한 것으로 유명하다.
 
서기 1592년(선조 25년)의 임진왜란과 1636년(인조 14년)의 병자호란에 소실된 것을 낭혜 대사(1539년)의 뒤를 이어 계민 선사(1637년)가 중건하고, 1749년과 1848년에 다시 중수해 고아하고 장중한 대찰의 면모를 되찾았다. 1950년 6·25 한국전쟁 때 16동 150간의 건물이 전소되어 1959년 화엄 스님에 의해 범종각이 복원되기 시작하였다. 오늘의 봉선사는 1960년 무렵부터 재건 불사를 일으킨 가람의 모습이다.
 
남양주 시내버스 종점이 있는 입구에는 2023년 3월에 낙성한 산문이 세워져 있다. 교구 본사로서의 위용을 자랑하는 산문은 전면 3칸, 측면 1칸으로 중앙 문이 더 높은 구조로 세워져 있고, 아직은 단청이 되어 있지 않다. 산문 뒤의 주차장을 지나면 일주문을 만난다. 운악산 봉선사라는 한글 현판이 걸려 있는 일주문은 3칸 문으로 안쪽 평방에는 원숭이가 눈을 막고, 귀를 막고, 입을 막고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구례 화엄사 일주문을 지나면 만날 수 있는 불견(不見), 불문(不聞), 불언(不言) 동자승의 가르침이 생각난다.
 
부도전을 지나 입구에 있는 느티나무와 하마비(下馬碑)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500여년 전에 정희왕후가 세조의 능침을 보호하기 위해 절을 중창하고 심었다고 한다. 6·25 한국전쟁을 겪으면서도 살아남은 나무이다. 느티나무 아래에는 주로 향교나 서원 등에 있는 하마비가 세워져 있다. 1469년 세조의 위패를 어실각에 모시고 세운 비이다.
 
봉선사의 누각인 청풍루 앞에는 하나의 바위를 깎아 만든 당간지주가 있다. 보기 드문 당간지주이다. 청풍루 오른쪽에는 범종루가 있다. 범종루에 있는 종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청풍루는 다른 절의 누각과 달리 금강문과 천왕문의 역할까지 하고 있다. 입구 초입의 좌우에는 입을 열고 있는 아금강역사와 입을 다물고 있는 훔금강역사가 그림으로 그려져 있고, 그 뒤로는 사천왕 그림이 그려져 있다. 청풍루 2층은 설법전으로 쓰이고 있다.
 
청풍루를 지나면 삼층 석탑과 대웅전이 1탑1금당 가람 배치로 자리 잡고 있다. 큰법당으로 불리는 대웅전 앞에 있는 삼층 석탑은 1975년에 운허 스님께서 스리랑카에서 모셔온 부처님 사리 1과를 봉안한 탑이다. 큰법당은 1960년대에 철근 콘크리트 건물로 지어졌고, 큰법당이라는 한글 현판이 걸려 있다. 법당 사방 벽에는 한글 『법화경』과 한문 『법화경』을 동판에 새겨놓아 이채롭다. 콘크리트 건물이면서도 공포의 구조나 처마와 지붕 등이 목재 건축에 뒤지지 않는다.
 
그동안 속리산 법주사의 미륵불처럼 콘크리트로 복원했던 많은 문화재가 금동상이나 목제 건물로 바뀌었지만, 이곳 봉선사 큰법당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나름대로 6·25 한국전쟁을 겪으며 어려웠던 시절의 건축물로서 역사적 의미가 있다. 불교 경전의 한글 번역 작업에 큰 발자취를 남기신 운허 스님의 뜻에 따라 대웅전이라는 현판 대신 큰법당이라는 현판을 걸고 큰법당으로 불리고 있다.
 
큰법당을 바라보고 좌측에는 1999년에 복원된 관음전이 있고, 우측에는 지장전이 있다. 지장전은 원래는 세조대왕과 정희왕후의 위패를 모셨던 어실각(御室閣)이었으나 1999년에 복원되어 지장전으로 사용되고 있다. 지장전 뒤로는 납골당으로 쓰이고 있는 개건당이 있다. 봉선사는 납골당이 있어서 49재와 천도재 등을 많이 지내고 있다. 홈페이지에는 각 제사 비용까지 공지하고 있는 점도 특이한 점이다. 예전에는 왕의 능침을 수호하기 위한 절이었지만, 지금은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주는 절이라는 생각으로 포근한 마음을 갖고 둘러 보았다.
 
관음전 뒤쪽에 있는 삼성각도 특이하다. 전면 3칸 측면 1칸 건물 전면에는 독성각(獨聖閣), 북두각(北斗閣), 산령각(山靈閣)이라는 세 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1926년에 건립되어 6·25 한국전쟁 때 소실되지 않은 유일한 전각이라고 한다. 내부에는 원흥사(元興寺)에 봉안하였다가 옮겨온 칠성탱과 독성탱이 봉안되어 있다. 산신탱은 1973년에 조성되었다고 한다.
 
청풍루 옆의 회랑 앞에는 현대적 조각상으로 조성된 석조관세음보살상이 세워져 있다. 풍만한 몸에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고 천수 천안으로 묘사되고 있는 기존의 관세음보살상과는 달리 갸름하고 날씬하며 언뜻 보면 성모 마리아를 연상시키는 관세음보살상이다. 서울의 길상사에 있는 관세음보살상과 동일한 조각상으로 서울대학교 최종태 교수가 2017년에 만든 작품이라고 한다. 최종태 교수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시면서도 한국 고유의 조각품에 관심이 많으셨다. 김수환 추기경께서 법정 스님을 소개해 주셔서 길상사와 이곳 봉선사에 봉안된 관세음보살상을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길상사 관세음보살상 점안식 날에 법정 스님은 관세음보살과 성모마리아는 그 상징성이 같다는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범종루 옆에는 대의왕전(大醫王殿)이라는 현판을 달고 있는 약사전이 있고, 약사전 옆에는 연리지(連理枝) 단풍나무가 있다. 사찰도 아름답지만, 앞에 연못이 있고 연못 주위로는 많은 불상이 있다. 정원이 커서 산책하기에 좋은 장소이다. 연못에는 수련과 꽃창포가 예쁘게 피어 있었다. 수련이 있는 연못 앞에는 연꽃이 심어져 있는 넓은 연못이 있다. 8월에는 연꽃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절 입구에 있는 부도전에는 ‘춘원 이광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일제에 협력한 친일파로 매도되어 잊혀 가고 있는 춘원 이광수를 기념하는 비이다. 예전에 이광수 선생의 많은 소설 등을 읽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던 시절이 생각난다. 운허 스님과 춘원 이광수는 6촌 간으로 어린 시절 같이 공부하면서 자라났다고 한다. 이광수가 친일변절자의 오명과 아들 봉근의 죽음 등으로 괴로워할 때, 『법화경』을 소개해주어 불교의 세계로 인도해 주었으며, 감명을 받은 춘원이 '법화행자'의 길을 걷도록 조력해주었다고 한다.
 
또한, 중창대시주 이월파 공덕비(重創大施主 李月波 功德碑)가 있다. 이월파(李月波)는 유신 초기 중앙정보부장 이후락(李厚洛) 씨라고 한다. 근처에 있는 승과원(僧科圓) 비(碑)에는 이곳이 명종 7년에 스님들의 과거(僧科)가 열려서 서산 대사, 사명대사 등이 응시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운 좋게도 절 입구에서 밀운 부림(密耘 部林) 큰스님을 만나 단체로 귀중한 즉석 법문을 들을 수 있었다. 밀운 대종사께서는 지금 92세인데 아직도 본인이 정정하신 것은 방생을 많이 한 덕택인 듯하다고 말문을 여셨다. 남을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말라는 법문과 생명 존중 법문을 해주셨다. 길가에 죽어 있는 지렁이를 잘 치워주면 거기에 붙어 있는 수많은 개미의 생명을 건질 수 있다고 말씀하시며, 바다나 강에 가서 한두 마리 물고기를 방생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생명을 건질 수 있다고 하셨다. 우리와 함께 기념촬영까지 할 수 있게 허락해 주셨다.
 
밀운(密耘) 대종사님은 속명이 변희준(邊熙峻)으로 1934년 10월 29일 황해도 연백군에서 출생하셨다. 법명은 부림(部林)이시다. 봉선사 운허 스님께서 고요하면서도 깊은(密) 정진(耘)을 이어가는 부림 스님에게 법호 밀운(密耘)을 내리셨다. 처소에는 눈을 뜨고 잠에 든다는 개안수면(開眼睡眠)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1997년 제25교구 본사 봉선사 주지를 역임하시면서 주지 재임 시절 봉은사 토지 2만 평을 되찾는데 기여한 공로가 크다.
 
 

▲ 운악산 봉선사 산문
▲ 일주문
▲ 불문(不聞)
▲ 불언(不言)
▲ 불견(不見)
▲ 일주문에 달려 있는 작은 종
▲ 스님들의 과거시험인 승과 시험을 보던 곳인 승과평터
▲ 정희왕후 시절부터 지금까지 봉선사를 지키고 있는 느티나무
▲ 밀운 부림(密耘 部林) 대종사님의 법문을 듣고 기념촬영
▲ 하마비 -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
▲청풍루
▲범종루
▲ 입을 다물고 있는 훔금강역사
▲ 입을 벌리고 있는 아금강역사 - 아훔은 시작과 끝 즉, 알파와 오메가
▲ 청풍루 2층의 설법전
▲ 큰법당 앞의 3층 석탑
▲ 콘크리트로 건축된 큰법당
▲ 큰법당
▲ 관음전
▲지장전
▲ 음식을 준비하는 우물앞
▲ 우물
▲ 삼성각
▲ 삼성각 칠성탱
▲석조관세음보살상
▲납골당으로 쓰이고 있는 개건당
▲ 납골당 옆에 누군가 심어 놓은 산수국
▲조사당
▲ 단풍나무 연리지
▲약사여래
▲야외 미륵불
▲ 춘원 이광수 기념비
▲ 춘원 기념비 뒤에 있는 소나무
▲중창대시주 이월파 공덕비 - 전 중앙정보부장 이후락 씨의 공덕비